사물놀이는 우리전통문화인 풍물과 무속음악의 결합에서 시작돈 새로운 전통문화이다. 그 이름이 처음 불려지게된것은 1978년 공간사랑에서의 데뷰 공연에서 시작된다.


5살때부터 남사당에 들어가 양도일선생, 남운용선생, 송순갑 선생으로부터 온갖 기예를 사사 받은 김덕수. 남운용 행중에서 최성구, 양도일선생 등으로부터 기예를 배운 김용배. 역시 남사당에서 김복섭스님, 이성호 선생으로부터 비나리를 전수받은 이광수. 삼천포 지역에서 당대의 소고잡이로 인정받고 있던 최종실. 이들의 만남은 사물놀이의 탄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때에 과거 전문예인유랑집단으로써 이름을 날리던 남사당에서 잔뼈가 굵은 20대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때는 판이 벌어지면 온갖 귀염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몇몫의 놀이채를 받던 재간동이들이었으나 세상은 변했고, 더 이상 판은 벌어지지 않았고, 배운 것이라고는 판놀음 밖에 없는 그들이 어른이 된 것이다. 이들이 뭉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굿판을 벌리게 된 것은 어찌보면 사라져가는 굿을 살리기 위한, 그리고 그들이 놀아야 될 굿판을 스스로 찾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이러한 만남을 가능케 한 조건입니다. 당시 국악예고에 같이 재학하고 있던 시절에 그들은 서로를 알아나가면서 전통예술 재창조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열정을 불태웠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뼛속깊이 체득한 전통적인 가락을 시대에 맞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웃다리 풍물'이라는 작품으로 최초의 결실을 맺게되며 1978년 2월, '공간사랑'에서의 첫 번째 공개 연주회에서의 대중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초기의 멤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김용배, 최종실, 김덕수, 이광수의 구성이 아니라 최태현, 김덕수, 김용배의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좀더 전문적인 기능을 추구하고자 멤버를 교체하게 됩니다(이후 '호남 우도굿', '영남 농악'을 잇따라 발표하며 열광적인 호응을 받은 바 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사물놀이는 새로운 음악으로써 국내는 물론 전세계로 발돋음 하여 찬탄과 감동을 자아내며 그 저변을 확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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